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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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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칼리굴라) 시대 ==== 티베리우스는 동명의 아버지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리비아 드루실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티베리우스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카이사르파의 일원으로 이두스 마르티이(3월의 이두스) 사건 이후 안토니우스 형제측을 지지한 ‘옛 카이사르파 내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파’에 속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법무관 임기 종료 직전부터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했고,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카푸아 반란에 동참한 이유로, 그의 가족들은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몰락한 이후 삼두파의 결성, 옛 카이사르파 내 화합으로 사면령이 내려지면서 겨우 로마로 되돌아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가 어머니 리비아에게 반하였기 때문에 이혼하라고 압력을 행사했고 결국 리비아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이혼 후 아우구스투스와 재혼하게 되었다. 티베리우스는 나중에 태어난 동생인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와 같이 아버지에게 남겨졌으나 티베리우스의 나이가 9살일 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드루수스와 함께 아우구스투스의 황궁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의 오랜 친우이자 충직한 부하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딸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의 아들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에게도 중요한 지위를 부여했다. 티베리우스는 22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군단 사령관이 되어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에서 상실했던 로마의 기지 일부를 되찾아 오면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다. 또한 아드리아 해안의 일리리쿰 속주에서 판노니아 족을 격파하고 판노니아 속주를 점령해내었고 파르티아 제국과 외교교섭도 맡아 아르메니아 왕국을 로마의 보호령으로 삼으며 완충지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AD 9년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로마군이 게르만족 일파인 케루스키 족에게 점령당하는 참패를 당하자 티베리우스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여러 차례 진격하여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러한 화려한 전적과 달리 티베리우스에게 개인적인 불행이 잇달아 찾아왔다. 우선 게르만족 공략을 맡았던 동생 드루수스가 말에서 떨어져 사망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더욱이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후계자로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를 낙점하고 그들의 후견인으로 아그리파를 선택하여 자신의 딸인 율리아와 결혼시켰으나 아그리파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티베리우스를 율리아와 결혼시키고자 하였다. 티베리우스는 어쩔 수 없이 아그리파의 딸과 이혼하고 율리아와 재혼하여 그녀의 아들인 가이우스와 루키우스의 후견인 노릇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가이우스와 루키우스 모두가 요절하면서 아우구스투스의 양자가 되는 기회를 얻었지만 이번에는 친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카인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맞이해야 했다.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의 외손자이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의 다음 후계자로 율리우스 가문의 혈통의 게르마니쿠스를 삼도록 한 것이었다. 비록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혈육이 아니었기 때문에 후계자로 지명하는 것에 마지막까지도 망설였으나 티베리우스는 유능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통치체제를 유지하며 국경지대를 정비하는 한편 지나친 사치와 향락을 억제하고 긴축재정을 펼쳐 재정을 풍부하게 했다. 하지만 황제가 주최하는 전차 경기대회와 검투사 경기를 중지시켰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의 인기는 잃었다. 더욱이 AD 26년 티베리우스는 근위대장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에게 통치를 일임하고 카프리 섬에 은둔하였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폐쇄적이지만 유능한 티베리우스는 수도 로마에서의 염증으로 은둔중에도 전반적인 통치는 원거리 파발로 잘 처리하였다.(후세에 고고학적으로 발견한 각종 시설물과 도로등에 새겨진 글로 근대에 오면서 점점 고평가되고 있다) 다만, 로마 원로원과 수도 로마의 시민들은 통치자가 자신들의 곁에 없는 것을 매우 매우 싫어하였다. 비록 수도에서 세야누스의 전횡이 심해지자 AD 31년 세베루스를 처형하여 혼란을 정리하였지만 여전히 카프리 섬에 은둔하면서 통치를 하였고 더욱이 말년엔 의심병 때문에 고발에 의한 고문과 처형이 연이어 벌어지는 공포 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폭군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단, 주타겟은 원로원 의원들로 그들과의 사이는 점점 나빠지다 후반부에는 최악이었다) AD 37년 티베리우스가 병사하자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손녀인 아그리피나의 아들 가이우스가 황제가 되었다. 가이우스는 아버지인 게르마니쿠스가 지휘하던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이 지어준 '칼리굴라'('꼬마장화'라는 뜻)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하였는데 70대의 노쇠한 티베리우스 말년의 공포정치에 지친 로마시민들은 24세의 젊은 나이에 즉위한 칼리굴라에게 열광하였다. (본인은 칼리굴라라는 애칭을 싫어하였다) 하지만 타키투스, 디오 카시우스 등의 기술에 의하면, 이런 공포분위기는 계속 되었고 불행하게도 가이우스는 목숨을 건진 대신 오랜 시간동안 티베리우스에게 제왕교육을 받은 탓에 그 통치방식을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가이우스는 단독세습 직후 티베리우스가 중지시킨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유언 집행과 각종 행정결정을 재개시켰다. 이때 그는 본인과 황실의 이름으로 전차경기와 검투사 시합을 매일 같이 열고 축제를 베풀며 ‘빵과 서커스’로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8개여월 만에 심한 고열로 쓰려졌고,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중병 회복 후 정신병 증세를 보인 미치광이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은 온전히 믿을 수 없는 황색언론인 탓에 무조건 신뢰하긴 어렵고, 오늘날 연구자들은 이때부터 가이우스의 노골적인 황제 권력강화와 그 전제화가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38년부터 41년까지의 기간동안 가이우스는 개인우상화, 임페라토르와 프린켑스의 권력을 통한 숙청 등을 통해 원로원과 대립했고, 그 과정에서 황제는 조폐발행권 장악, 곡물수송에 대한 새로운 권력 획득, 사법과 재판 권한 신설 등을 이 시기에 장악하는데 이 조치들은 41년 이후에도 황제들이 계속 장악했다. 하지만 이러한 가이우스의 행동은 원로원, 로마 내 최상위 기사계급과 부자들에게 정신질환 내지 변덕스러운 독재로 해석됐고, 황제의 생활 역시 화려하고 방종한 면이 있어 원로원 내에서 티베리우스와 다를게 없다는 말이 나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가이우스를 노린 암살 시도는 39년 후반부터 현직 집정관 두명 등이 가담하는 등의 사건을 시작으로 수차례 벌어졌고, 서기 41년 1월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 율리우스 루푸스가 부하 20여명과 함께 황제를 암살하면서 가이우스의 변덕스럽고 노골적인 전제권력화 시도는 4년만에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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